2016년 12월 30일 금요일

신년 가족예배 (2017.1.1)

2017년 신년 가족 예배
찬송




성경말씀
에베소서 4:17-24 / 2014.02.12 / 개역개정판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기도
이동진 집사님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 에베소서 4:1724)

박조준 목사(갈보리교회)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각자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따라서 대답이 각각 다를 것입니다. 어떤 이는 돈이라고 대답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사랑이라고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지혜라고 말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쾌락이라고 말할 것이고, 어떤 이는 덕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철인 피타고라스는 한 번 주어진 이 엄숙한 인생, 이 존귀한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디에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행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보람 있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올바른 생각과 확고한 정신자세, 그리고 분명한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태도로 사람을 대할까? 어떤 마음으로 내게 맡겨진 직분과 사 명을 감당할까? 어떤 자세로 민족 앞에 설까? 어떤 심정으로 역사에 참여할까? 어떤 인생관과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갈까?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나의 설자리는 어디며, 나의 삶의 목표는 무엇이며,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내 삶의 의미 는 어디서 찾을까?'
이러한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한 분명한 대답과 확고한 신념을 우리는 '인생관' 또는 '가치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이 고귀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우리의 기본 태도가 인생관과 가치관의 핵심을 이룹니다.
그 어떤 것이 중요하다 해도,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확립하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생명관을 가질 때, 나의 생명과 남의 생명을 바로 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인생관을 가질 때, 나의 인생을 보람 있게 살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때, 올바로 행동하고 생활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직업관을 가질 때, 자기가 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게 되고 일하는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행복관을 가질 때,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민족관을 가질 때, 위대한 민족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역사관을 가질 때, 훌륭한 역사를 창조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국가관을 가질 때,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자연관을 가질 때, 자연을 아끼고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문명관을 가질 때, 위대한 문명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세계관을 가 질 때,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올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옳게 보는 것을 정관(正觀)이라고 합니다. 크게 보는 것을 대관(大觀)이라고 합니다. 통틀어 보는 것을 개관(槪觀)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볼 때 바로 보아야 하고, 깊이 보아야 하고, 넓게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보지 못할 때 피상적 판단을 하게 되고, 넓게 보지 못할 때 편협한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보는 것은 보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는 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어떤 인생관을 갖느냐 하는 데 따라서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와 자세와 목표가 달라집니다. 인생관은 단순히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행동 원리가 되고, 판단의 원리가 되고, 지도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올바로 보는 데서 올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행동의 근저에는 확고한 이론이 있어야 하고, 실천의 밑바닥에는 분명한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이론이 없는 행동은 그 힘이 약하고, 철학이 없는 실천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철학이 없는 국민, 신념이 없는 백성은 일어서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유혹 앞에 타락하기 쉽고, 시련 앞에 좌절하기 쉽고, 고난 앞에 낙망하기 쉽습니다. 초지일관의 행동, 시종여일한 생활, 백절불굴의 태도, 칠전팔기의 의지, 이 모두가 확고한 신념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잠언에 보면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이상이 없는 민족은 역사의 시련과 위기에 부 닥쳤을 때, 이것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 국민에게 가장 필요하면서도 결여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제의 행동보다 오늘의 행동이, 오늘의 행동보다 내일의 행동이 더 새롭고 훌륭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롭다는 것은 부단히 전진하는 사람의 모습이요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야 합니다. 성경에 '새 하늘과 새 땅'이란 말이 나옵니다. '낡은 사람과 새 사람'이란 말이 나옵니다.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새 마음으로 새 생활을 힘쓰는 새 민족이 되어 새 나라를 만들고, 새 역사를 창조하고, 새 세계를 건설해야 합니다. 만물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새 사람이란 무엇이고 낡은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새 사람이란 마음이 새롭고 생각이 새로운 사람이요, 낡은 사람이란 마음이 낡고 생각이 낡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낡았다, 새롭다'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나이입니까? 젊으면 새롭고 늙으면 낡았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새로워야 합니다. 젊은 사람이 낡은 생각을 가질 수가 있고, 늙은 사람이 새로운 생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생각이 사람입니다. 잠언에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이 되려면 그 사람의 생각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생각이 바꿔지지 않고는 그 사람이 새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생각의 혁명이요, 의식의 혁명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근본입니다. 생각이 바뀌면 사람이 바뀝니다.
스웨덴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석학 구너 뮈르달(Gunner Myrdal)은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명작 「국부론」 (國富論, 1767)이 출간된 지 200년 후 이에 대해 「국빈론」(國貧論, 1968)을 썼습니다. 그는 '남아시아 제국민의 빈곤에 대한 연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시아의 빈곤은 자원이나 자본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이 지역 주민의 불합리한 생활태도와 인습적인 사회제도에 기인한다."
다시 말하면 아시아가 가난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주민들의 의식구조와 정신 자세와 인생관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이 아시아의 전통적인 인간과 는 유형이 다른 새로운 인간형을 형성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비능률, 비활동, 비합리의 악을 없애고 능률과 활동, 그리고 합리적인 생활의 기풍과 사회윤리를 일으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국민의 새 인생관 건설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제학자도 경제 문제 해결의 방안으로 경제적 방법이나 원리가 아니라 국민의 의식 개혁을 제시한 것은 퍽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개인이건 한 민족이건, 번영 과 행복에 도달하려면 올바른 인생관의 확립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관이란 무엇입니까?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이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바로 사는 것이냐? 나의 삶의 목표와 사명이 무엇이냐? 삶의 의미와 보람을 어디서 찾느냐?' 이러한 인생의 근본적인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이 인생관입니다.
사람이 무엇이냐 하는데 대해서 동서고금의 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제시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은 사회적?합리적 동물"이라고 했 습니다. 프랭클린은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 바로 인간"이라고 밝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만이 생각합니다.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나의 사명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무엇을 위해 바칠 것인지를 결정하고, 나의 설자리를 알고, 나의 할 일을 깨닫고, 나의 나아갈 목표를 옳게 세우고, 내 생명을 높은 이념을 위해 바칠 때 우리는 사명적 존재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나로서 나의 설자리에 튼튼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사명을 자각하면 대장부가 됩니다. 그런 자리에 설 때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고 겁낼 것이 없습니다. 사람 앞에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되려고 힘씁니다. 인생을 정말 보람 있게 살려면 나 자신이 사명적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인생 을 떳떳하고 힘차게, 신념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명이란 무엇입니까?
사명의 사(使)자는 '심부름할 사' 자입니다. 작은 심부름하는 사람을 소사(小使)라 합니다. 나라의 큰 심부름하는 사람을 대사(大使)라고 합니다. 특별한 심부름하는 사람을 특사(特使)라고 합니다. 몰래 보낸 심부름꾼을 밀사(密使)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을 천사(天使) 라고 부르고, 목사를 하나님의 심부름하는 자라고 해서 사자(使者)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사명의 사(使)자는 의미심장한 글자입니다.
()자는 '목숨 명'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이란 심부름 받은 목숨, 심부름 받은 생명이란 뜻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느끼는 것을 사명감(使命感)이라고 합니다.
심부름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를 사명적 존재라고 합니다. 그런 인생관을 우리는 사명적인생관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사명적 존재입니다. 우리는 사명적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명이란 말을 영어로는 'Miss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Missio'에서 유래된 말인데 '보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직분과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사명감을 느낄 때 그는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고, 말하는 것이 달라지고, 움직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사명감이 우 리를 용감하게 만들고 부지런하게 만들고 진지하게 만듭니다.
심부름에는 심부름 보낸 분이 있고, 심부름 받은 사람이 있고, 심부름의 목적과 내용이 있습니다. 심부름 보낸 분은 하나님이시고, 심부름 받은 사람은 우리입니다. 그런데 내가 받은 심부름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대한 대답은 각각 다를 것입니다. 나를 보낸 것은 한국사회의 한 모퉁이를 개조하라고 여기 보냈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고장을 아름답게 하라고, 학문의 깊은 연구를 하라고, 예술의 위대한 창조를 하라고, 후세를 교육시키는 일을 하라고, 훌륭한 사업을 하라고, 병든 자를 고치는 일을 하라고, 억울한 사람을 변호하라고, 인류에게 유익과 편의를 주는 물건을 연구 개발하라고 보내심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 같은 경우는 이 백성을 영적으로 하나님께 인도하는 일을 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 심부름의 내용과 목적은 각자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서 다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깨닫고 느끼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명작을 쓴 사상가 칼 힐티어(Karl Hilthe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 인생의 사명을 자각하는 날이다."
인생 최고의 날이 언제입니까? 고시에 합격한 날입니까? 결혼한 날입니까? 첫 애를 낳은 날입니까? 대학에 합격한 날입니까?
아프리카 탐험의 대업을 성취한 리빙스톤(Livingston)
"사명감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실현할 때까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외쳤습니다. 사명감이 있는 사람은 집념이 있고 열의가 있습니다. 이것을 꼭 이루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와 신념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요지부동한 목적의식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그 동안 그가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수고한 일에 대해서 말하면서
"내가 지금 심령의 매임을 받아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각 도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습니다"하는 그의 결단을 말했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인물들의 생애를 보세요. 세상에서 큰 일을 한 사람들의 일생을 보세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큰 일을 하게 했습니까? 그들이 큰 업적을 남긴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생애의 어느 시기에, 어떤 결정적 기회에 인생의 확고한 사명을 자각했습니다.
사명을 자각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위대한 책을 읽고, 어떤 이는 생활의 절실한 체험을 겪고, 어떤 이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 사명을 자각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19살 때 뉴올리언즈의 노예 매매 시장에서 흑인 노예들 이 백인들에게 매매되는 처참한 비극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언젠가 때가 오면 저 놈의 제도를 힘껏 때려부수겠다."
이 충격과 의분과 결심이 아브라함 링컨으로 하여 금후일에 노예해방의 위대한 일을 성취시키게 했습니다. 그의 가슴속에 맺힌 큰 사명감이 그로 하여금 노예해방의 큰 일을 해내게 한 것입니다.
사명에 눈이 뜨이는 것처럼 놀라운 일이 없습니다.
사명을 자각하는 것은 인간을 새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것은 인간 혁명의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아테네의 등대의 직분을 다하겠다는 사명의 자각이 소크라테스를 위대한 철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죄악과 슬픔에서 구하겠다는 사명의 깨달음이 모세로 하여금 출애굽의 영도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사명감, 그것이 낡은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드는 인간 혁명의 결정적 요소입니다. 그것은 거듭나는 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새 사람은 높은 이상(理想)을 가집니다.
이상이 없는 인생은 목표가 없는 여행과 같습니다. 인간은 이상을 가슴속에 간직할 때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밤낮으로 분투 노력합니다. 이상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바람직한 목표, 푯대입니다. 이상이 없는 국민은 타락하고 맙니다. 이상이 없는 사람은 자포자기하기가 쉽습니다. 방안에 등불이 꺼지면 그 방안은 캄캄해집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상의 등불이 꺼질 때 우리의 삶은 낮은 차원으로 전락하기가 쉽습니다.
고난을 뚫고 나아가는 용기, 가난에 도전하는 의지,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씩씩한 기상, 한 번 세운 목표를 끝까지 향해 나아가는 지구력,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굳은 신념, 칠전팔기하는 끈기, 이 모든 것이 마음속에서 푯대를 향해 끝까지 달릴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가슴속에 이상의 샘물이 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이상의 태양이 꺼지지 않아야 합니다. 시인 쉴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을 위대하게 하거나 비열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이 품는 뜻에 달렸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년 벽두에 높은 뜻을 세워야 합니다. 위대한 인물일수록 위대한 뜻을 세우고, 위대한 소원을 가집니다. 소원이 얼마나 크고 높으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뜻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뜻을 세우되 큰 뜻을 세우고, 옳은 뜻을 세워야 합니다. 세상에는 뜻을 세우되 나쁜 뜻을 세우는 이도 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는 길이 있습니다. 뜻이 간절하면 반드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길과 방법이 생깁니다. 우리가 뜻을 세우지만 이루지 못하는 것은 그 뜻이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세상에 집중력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태양 광선을 렌즈로 집중시키면 종이나 나무가 탑니다.
뜻을 세운 다음에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꾸준히 힘을 길러야 합니다. 힘을 기르는 것, 실력 양성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다가오는 21세기는 실력 경쟁의 시대입니다. 실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힘이 없을 때 그 훌륭한 목표는 한낱 허망한 공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했습니다. 좇아가는 삶의 자세는 정말 귀합니다.
그리고 새 사람이 되면 열심히 일합니다.
일하는 것을 영어로는 'achievement'라고 합니다. 성취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뜻을 세우고 푯대를 정하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 달려가고 좇아가는 것은 결국 보람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은 나무의 열매와 같습니다. 나무가 잎이 나고 꽃이 피는 목적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지식의 열매는 행동이요, 사상의 목표는 실천이요, 뜻과 힘의 결론은 일에 있습니다.
뜻이 뜻만으로 머무르고, 힘이 힘만으로 머무른다면 뜻과 힘에 무슨 가치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무는 그 열매에 의해서 가치가 판단되듯이 사람은 그 행동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봉사의 열매입니다.
인생에는 주고받는 원리가 있습니다. 'give and take'의 법칙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남녀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랑을 받는 만큼 주어야 하고 주는 만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고받는 원리가 원만하지 못하면 그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부부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서로 비슷해야 합니다. 짝사랑은 비극입니다.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것은 이기주의입니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것은 개인주의입니다.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주는 것을 합리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받을 생각을 떠나서 주려고 하는 삶, 이것은 새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봉사주의 인생관입니다. 이것은 이기주의의 정반대인 이타주의입니다.
봉사주의는 주려고 하고, 주는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그것은 차원 과 수준이 높은 삶입니다.
봉사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남에게 주는 것입니다. 강요당해서 남을 돕는 것은 진정한 봉사가 아닙니다. 자원해서 남을 도울 때 그것을 봉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봉사는 인간의 행동 중에서 가장 높은 차원의 행동입니다. 위대한 인물이란 위대한 봉사를 한 사람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쳐가 왜 위대합니까? 테레사 수녀가 왜 훌륭합니까? 위대한 봉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 새 사람만이 봉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은 봉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봉사를 하려면 여력(餘力)이 있어야 합니다. 거지는 남에게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합니다. 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무엇인가 주려면 풍성하고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사람은 남에게 많이 줍니다. 많이 주면 줄수록 위대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러면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리라."
받는 손보다 주는 손이 복이 있습니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남에게 줄 때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내가 준다는 생각을 떠나, 누구에게 준다는 생각을 떠나, 무엇을 주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란서 말에 '노블레스 오블리지'(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블레스는 고귀한 신분이란 뜻이요, 오블리지는 의무란 뜻입니다. 고귀한 신분에는 의무가 따른다 는 뜻입니다. 특권에는 사명이 따르고, 신분에는 의무가 수반됩니다. 남보다 뛰어난 사람은 남보다 더 많은 의무와 책임과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남에게 주는 생활에 있습니다.
샘터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듯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서 봉사, 헌신의 따뜻한 햇살이 늘 퍼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송
1916. 새롭게하소서 (해아래 새것이 없나니) <악보>



주기도문
1916. 새롭게하소서 (해아래 새것이 없나니) <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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