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주기 아버님 추모일 기념 예배
신앙고백 사도신경
찬송 493장
대표기도
말씀 사무엘 상 17:24~26, 45~47
(삼상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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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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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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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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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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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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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신화나 전설, 혹은 소설
속에 나오는 꾸며낸 이야기 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이야기는 3천년 전 이스라엘 역사 속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어 통치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 서남쪽에
살고 있던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다. 이들에 맞서 이스라엘 군대는 엘라 골짜기라는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싸움은 하나마나 이스라엘의 패배가 자명했다. 블레셋
군대를 이끄는 장수는 골리앗인데 갑옷을 입은 그는 3미터의 거구에 베틀채 같은 창을 들고 있었다. 그의 존재 앞에 이스라엘 군대는 감히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24~25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를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치기 바빴고 그들은 도망치면서 옆의
동료들에게 이렇게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너희가 이 올라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들이 이렇게 두려움에 빠져 도망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
모두의 눈에는 이 싸움이 단순히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싸움으로 보였고 그래서 그들의 눈에 비친 객관적인 전력은 이미 이스라엘의 패배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단 한 사람 다윗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보았다. 26절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라고 했다. 다윗의 눈에는 이 상황이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싸움이
아니었다. 블레셋과 하나님의 군대가 싸우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45절에서 47절까지 다윗은 창칼 대신 막대기와 물매만 손에 들고서도
골리앗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로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그리고 다윗은 승리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골리앗이 이끄는 군대와 대치하면서 그 싸움을 단순히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바라보고 객관적인 전력으로 참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린 다윗은 관점이
달랐다. 그 관점은 패했다고 모두가 포기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관점의
차이가 패배를 승리로 바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상황 속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상황을
지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대처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하나의 상황 앞에 있다.
우리를 낳으시고 길러주신 아버지가 우리와 행복한 시간을 더 누리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이
상황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전혀 다른 결과가 주어진다
단순한 아버지의 죽음으로 보는 관점을 가진다면. 우리 곁은 떠난 슬픔. 채 못 누린 행복, 너무 일찍 보낸 억울함 슬픔 좌절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다. 다른
한편은 죽음을 넘어 부활의 관점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 관점으로 죽음은 기쁨과 소망 그리고 영원한
평안과 안식을 의미한다 부활 소망을 믿는 사람은 죽음이 더 이상 두렵고 무서운 것이 아니고 천국에의 소망을 의미한다.
성경은 죽음 이후에 대해 히브리서
9:27에 이렇게 말씀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말씀대로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죽음 뒤에 심판이다. 이것을 보아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심판이라는 단어 앞에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다. 어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심판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심판을 대비할까? 요한복음 3:16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 베드로전서 3:18은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12에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또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멸망하지 않고 (심판받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죽음이 더 이상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이 아니고 기쁨과
소망과 평안이 된다. 그래서 아버님은 예수님의 자녀가 되셨고 심판대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계신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다면 우리 모두
아버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님의 죽음 앞에서 기쁨과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부모의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인가? 바로
사랑하는 자녀가 잘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녀는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가장 큰 효도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녀 삼아 주셨고, 아들을 내어 죽기까지
모든 것을 주어 자신을 희생하며 우리를 죄에서 살리셨다. 자식에게는 목숨도 아까울 것이 없는데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이 아깝겠는가? 그런 예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예배 드리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의 삶을 기쁘게 받으신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오늘 우리는 아버님의 죽음을 슬퍼하기 위해 모였는가? 위로 받기 위해 모였는가? 아니면 죽음을 두려워하며 모였는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계시는 아버님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천국에서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할 소망을 가지고 오늘 우리의 영혼이 심판 대신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주님 손 꼭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 천국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찬송 488장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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