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301 지금까지 지내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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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6:7~9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Deuteronomy 6:7~9
7 Impress them on your children. Talk about them when you sit at home and when you walk along the road, when you lie down and when you get up. 8 Tie them as symbols on your hands and bind them on your foreheads. 9 Write them on the doorframes of your houses and on your gates.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부모는
자녀에 대하여 ‘신앙 교육’의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특히 여기서 ‘부지런이 가르치다’란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난’은 본래 ‘날카롭게
하다’ 혹은 ‘찌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생명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의 마음과 영혼을 예리하게 찌르듯 감동시키고 또는 교훈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개인과 가정의 일상 생활 속에 깊게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진술한 부분이다.
이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신앙 교육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워 주는데, 후일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특별히 권면한
점이기도 하다(엡 6:4).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강론할
것이며 - 자신 및 자신의 가족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듭 주지시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일상 삶과 사고 (思考) 가운데서 늘 말씀에
유의하며, 또한 이를 준수하는 생활에 힘쓰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손목에 매어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행동의 지침으로 삼으라는 뜻. 손은 마음속의 생각을 행동으로 실행하는 지체(肢體)이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행동의 지침으로 삼으라는
의미이다
미간에 붙여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사고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뜻. 미간(眉間)은 대개 인간의 지성과 사고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사고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활 곳곳에 깊이 스며들도록 삼가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이 가정을 온전히 주관토록 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모든 말씀은 단순히 여자적(如字的)으로 그렇게 실행하라는 뜻보다는 언제
어디에서나, 행동으로든지 마음으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하여 지키라는 뜻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뿐이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것을 문자대로 해석하여 본절과 같은 명령이 들어 있는 성경의 구절들을 양피지에 그대로 베껴서 그것을 띠로 만들어 부착하고 다니는 경문(經文)의 풍습으로 발전시켰다. 이것이 예수님 시대에는 바리새인들에 의해 외식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졌기
때문에 예수님께 크게 책망을 받기도 했다.
<추도예배란>
"나를 있게 한 분이 아버지요 어머니요 할아버지요 할머니요 조상들입니다. 조상들이 있으므로 내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날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모임입니다.
조상들의 어려움 속에서도 나를 이렇게 살게 하여 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자손들이 모여서 부모들이 나를 키워주심에 감사하며 조상들의 좋은점을 본받아 앞으로 나의 후손들이 곁길로 가지 아니하고 나와 후손들이 부모님의 뒤를 이어서 참으로 옳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모여서 예배드리고 그의 뜻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기억하는 모임입니다."
신명기 6 : 4-9
"여호와의 율법을 기억하고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순종하기 위하여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행할 때에든지 누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부모의 좋은 습관은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여 생활에 적용해야만이 옳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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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추도예배
추도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국어사전적인 의미로는 “죽은 이를 생각하여 슬퍼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단지 죽은 자를 생각하고 슬퍼하기 위해서 예배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할 때 그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말에다가 예배라는 말을 덧붙여서 사용한다면 슬퍼하는 예배가 될 것이다. 아니면 슬픔을 달래기 위한 예배가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예배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단순히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행위도 아니다.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행하는 믿음을 통한 인간의 찬양과 경배이다. 따라서 죽은 자를 생각하는 예배란 있을 수 없다. 또한 슬퍼하는 예배도 있을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무속적, 유교적 전통이 만들어 낸 제사를 대신하는 것으로 추도예배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에 대한 신자들의 분명한 이해가 전제되는 것이 필요하다. 제사의 의미로 추도예배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제사는 죽은 영혼을 기리는 종교적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제사를 대신하는 개념을 가지고 예배하는 것이어서는 안될 일이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형성된 제사에 대한 인식은 죽은 영혼을 기리는 의식이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추도예배는 이를 대신하는 의식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래서 가끔이긴 하지만 신자들의 가정에서 행하여지는 소위 추도예배에 참석해 보면 제사상과 같이 차려놓고 절하는 대신에 예배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더욱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예배하는 어떤 동기와 이유가 있다고 해도 감사를 통해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비록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죽음은 인간적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체험하는 기회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슬픔과 함께 감사의 이유가 된다.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언약을 깨닫고 받은 사랑과 은혜를 확인하고 느끼게 된다면 굳이 그 날이 정해질 이유가 없다. 즉, 언제든지 그러한 감사가 있다면 그때 감사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죽은 자에 대한 생각이 날 때 언제라도 하나님께 예배 할 수 있는 것은 신자의 특권이다. 그래서 죽은 자의 생일 혹은 사망일을 기억하는 것도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 날을 기억하는 것을 통해서 죽은 자에 대한 생각을 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이유를 찾고 그 사실을 통해서 기뻐하며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하고 그 은혜를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추모일을 통한 예배(추모일 예배)라는 말로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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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493 하늘 가는 밝은 길이